흥덕 수기책방

참여노인수기<“원더풀 라이프(Wonderful Life)”> - 정상옥 참여자

어둑새벽 공기가 청량하다. 창문을 활짝 열어제치니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풋풋한 오월의 아침 공기가 활기찬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커피머신 돌아가는 소리가 새 아침의 적막을 좀은 깨트렸지만 오늘은 그 소리마저 경쾌하게 들린다. 한가득 담긴 머그잔의 커피를 두 손으로 거머쥐고 창문 밖 고즈넉한 아침 풍경을 바라본다.

손만 뻗으면 될 만 한 거리에 나의 일터가 보인다. 아니, 일터라기보다 내가 선망하던 해피드림 가든이 저곳에 있다. 그 꽃밭 안에서 찬란한 아침햇살을 받고 재재굴거리며 피어나는 갖가지 꽃을 닮은 아이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만 같다. 커피향보다 더 진한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번지며 가슴이 콩닥거린다. 아이들이 벌써 그립다.


한 갑자(甲子)를 넘기며 살아오는 동안 내 삶은 참 부단히도 종종거렸다. 부산하게 뛰어다녔건만 뒤안길은 늘 헛헛했다. 돌아서면 흔적 없는 내 발자국들이었지만 그냥 그렇게 사는 게 안온한 삶이라 생각했다. 지극히도 평범했던 시간 안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 살아왔던 적은 지극히 드물었다.

세 딸들의 육아, 그리고 사업하는 남편의 내조로 삼십 여 년을 넘도록 동동거렸지만 인생이란 무대에서 늘 조연으로 살다가 어느덧 시니어, 즉 노인이란 칭호를 달았다.

지척으로 출가한 딸들에게 손주가 생기며 나의 분주한 손길은 다시 그 아이들에게 옮겨갔다.

삼 년쯤 지나자 잘 갖춰진 교육행정과 사회복지 덕을 볼 수 있으니 손주들에게까지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엄마의 역량을 펼치며 살라며 자식들이 권유했다. 그때 자식들의 그 말은 이젠 어미와 할미의 손길이 필요치 않다는 말로 들려 공연스레 섭섭하여 한동안 마음이 상했었다.

늙는다는 건 어쩜 존재가치가 잊히는 것, 더 심하게 말하자면 한계에 다다른 쓸모가 버려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울에 비치는 늙은 몰골이 눈에 들어오니 서럽고 자괴감이 들었다.

 

늘 하던 손주의 하원 시키는 일과가 내 손을 떠나자 나의 오후 시간은 길고 길었다. 길섶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으며 폴짝폴짝 뛰던 손주 녀석의 진주알 같던 웃음소리도, 흙먼지 풀풀 날리는 놀이터 한 귀퉁이에서 한나절 이슥도록 두꺼비 집을 만들던 불과 몇 달 전의 그 시간이 추억인 양 정말 아득했다. 아이들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던 일들을 유추할수록 나의 쓸모는 이제 소진되었다는 자괴감이 가슴을 더 짓눌렀다. 소진된 쓸모는 우울과 무력감으로 나의 온 일상을 잡아맸고 내일에 대한 희망과 기대마저 사그라지게 했다.

어느 날, 정말 우연하게 청주 흥덕 시니어 클럽이란 기관을 알게 됐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 스산한 초겨울에 시니어 클럽의 일자리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든 그날은 행운이었을까.

시니어 클럽 노인 일자리사업 참여 사업으로 사회서비스 형 “아이 꿈 더하기” 사업은 내게 신이주신 선물 같은 자리였다. 초등학교 교사는 늘 상 가슴 한편에서 이루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아있고 선망의 대상이었기에 “아이 꿈 더하기” 프로그램 참여는 꿈의 자리였다.

합격 통지를 받던 그날은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인데 노년의 낯선 객의 출현으로 혹여 동심에 얼룩지게 하는 건 아닌지 출근 날이 다가올수록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시니어 클럽 기관에서 참여자들에게 친절한 사전교육도 시켜주었고 다 년간 참여하신 시니어들의 생생한 체험담을 들으며 용기를 얻었다. 문명의 발달과 교육기관의 다변화는 수십 년 전 내가 알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나니 설렘보다는 걱정이 또 앞서기도 했다.

나 자신을 다독이며 용기를 복 돋우었다.

 

“나는 당당한 시니어다. 사회에서 쓸모를 잃은 늙은이라기보다는 연륜이 익어간 인생의 선지자다.” “나는 화려하진 않아도 관대하고 온유하게 포용할 수 있는 은빛 시니어다.”

“내 인생은 이제부터 내가 주인공이다.”

 

돌봄 반 아이들과의 세 시간은 나의 삶에 새로운 혈기를 돌게 한다. 손자, 손녀 같은 저학년 아이들이 “선생니~임!” 하며 출근하는 나의 품안으로 달려들 때면 진정 행복하다. 간혹 “할머니!”하다가도 “아니, 아니, 선생님!” 하는 앙증스러운 모습에 한바탕 웃는다.

이십여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방과 후에 모여든 돌봄 반은 하교시간이 제각각 다르다. 맞벌이 부모들이 돌봄 교실과 갖가지 사교육 기관에 아이들을 맡기며 부모와 귀가 시간을 맞추기에 아이들이나 부모에게는 꼭 필요한 교육 방침이며 알찬 프로그램이다.

돌봄 반에서 시니어 교사인 나의 역할은 학습 보조와 하교하기 전까지 자유놀이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어우러져 놀아주는 것이다. 내 어릴 적엔 상상도 못하는 장난감과 교구재에 많이 놀랍기도 하고 놀이 방식도 생소하니 아이들이 되레 나를 가르쳐 준다.

아이들과의 어울림에서는 선두를 가리는 것보다는 아이와 함께 하는 것과 같은 눈높이를 맞추며 아이답게 놀아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서먹하던 아이들이 며칠이 지나자 서로 함께 놀겠다며 내 무릎으로, 내 품속으로 파고든다.


지난 어버이날엔 가슴 뭉클했다. 알록달록 예쁜 종이에 갖가지 그림으로 치장한 편지를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어 내게 한 아름 안겨주었다. 편지를 받고 한참 동안 가슴이 먹먹하여 말을 잊지 못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던 순간을 녀석들은 알까. 삐뚤빼뚤 꾹꾹 눌러쓴 내용에는

“칭찬해 줘서 고마워요. 내 편 되어줘서 감사했어요. 선생님이 우리 할머니 닮아 좋아요. 만들기 할 때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불과 몇 줄 속에서는 맞춤법도 제대로 맞지 않았지만 한 녀석, 한 녀석들의 마음이 녹아있었다.

담임 선생님의 배려로 마련한 이벤트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진정 주인공이었다.

꽃은 져도 꽃이다. 나이를 먹어 늙었다 한들 어미의, 할미의 지혜와 사랑과 쓸모가 없어질까.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준 시니어 클럽 노인 일자리 사업은 늙음으로써 대단한 나의 쓸모를 새롭게 발견해 주었다.


일한 만큼의 소정의 대가도 한 달이면 통장으로 여지없이 들어오니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있으랴. 사람은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더 즐거운 것이라 했다.

출근하는 길 양옆으로 고혹적인 오월의 장미가 터널을 이루더니 어느덧 하나 둘 꽃잎을 떨구고 있다.

담장 아래 떨어진 붉은 꽃잎이 양탄자를 깔아 놓은 것 같은 출근길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 걷는 발걸음이 사뿐하다. 꽃 중의 꽃, 우리 반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이 시간이 진정 행복하다.

아이 꿈 더하기는 나의 원더풀 라이프를 향해 다가가는 희망의 발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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